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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만 선대회장 1904.09.07 ~ 1994.02.14 나는 우리 동포들에게 의복을 주자고 결심했습니다. 헐하고 질긴 의복을 우리 동포들에게 입히고, 부녀자들을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고역의 생애를 그렇게 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생애로
						전환시키려고 했습니다. (1963년 8월, 나일론 원사공장 준공식 기념사에서)

한국섬유공업의 기수

1953년 한국에 최초로 나일론을 소개한 이원만 선대 회장은 1957년 4월 대구에 나일론을 생산하는 <한국나이롱㈜>를 설립하면서 한국섬유공업의 기수로 오늘날 코오롱그룹을 있게 한 터전을 다지게 됩니다.<한국나이롱㈜>의 설립으로 거미 줄 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며, 명주보다 고운 값싸고 질긴 나일론이 우리나라에 본격 보급됨으로써 한국에서의 역사적인 화학 섬유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디어와 정보가 사업을 성공시키는 요체가 됨을 주장해온 이 선대 회장은 평소 사업이라는 것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하는 게 아님을 강조, 국리민복이 진되는 이른바 상지상의 사업을 추구해 왔는데, <한국나이롱㈜>의 설립은 곧 우리나라 의생활의 혁명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수출한국의
선구자로 칭송된
기업인이자
정치인

이원만 선대 회장은 한 경제인 간담회에서 농공병진을 내세우고 공업 국가로 나아가야 하며, 수출입국과 공업단지의 조성 등 여러 가지 경제 정책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여 우리나라 주요 경제 정책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1963년에는 한국 산업 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오늘날 구로공단과 구미공단을 조성하는 산파역을 해내게 됩니다. '수출 한국의 선구자’로 칭해졌던 이원만 선대회장은 1968년 대통령상, 1977년 은탑산업훈장, 영면 후엔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은 기업인인 동시에 제6~7개 국회의원으로서 경제관련 분과위원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이원만 선대 회장 프로필

생년월일
1904년 9월 7일~1994년 2월 14일
경력
1994금탑산업훈장 수장
1981오운문화재단 이사장
1977코오롱 명예회장
1976코오롱그룹 회장
1972한국나일론. 한국폴리에스텔 명예회장
1963~19716,7대 국회원원(대구束 공화)
1962수출산업공단 이사장
1960.07참의원(경북 민주)
1951한국나일론 사장
1951재일한인무역협회 회장
1950.03삼경물산㈜사장 (일본)
1949제일한인 경제동우회 부회장
1941.03일본대학 중퇴
1937.03아사히피복 사장
1935.05아사히공예 사장
1930.04경북 영일군 산림기수보